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읽기 (3)
철학박사와 함께 읽는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
누스바움의 감정이론,
그 중에서도 수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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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스바움이 특히 관심을 가진 감정에는
혐오, 수치심, 연민, 분노 등이 있어요.
그는 이러한 감정들을 인간다움과 관련지어 논하면서
그 감정을 분석하고 그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탐구합니다.
여기서 분석이라는 건
그 감정이 어떻게 형성이 되는지,
그 감정에 포함된 믿음은 어떤 것들인지,
그것이 사회적으로 끼칠 영향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핀다는 뜻이에요.
지금부터는 여러 감정 중에서도
수치심에 중점을 두고 그의 주장을 더 살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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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스바움이 수치심에 주목하는 이유는
개인과 사회적 차원으로 나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차원에서 수치심은
자기애를 실현하지 못한 실패에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우리가 다루는 수치심은 shame의 번역어입니다.
영한사전을 찾아보면
수치심, 부끄러움, 창피 등의 뜻이 있어요.
창피는 한자어고요.
자신의 체면이 깎일 일을 당하여 부끄러워하는 게 창피입니다.
그래서인지 가끔 창피는 오히려 역정을 내는 일이 뒤따라오기도 하고,
민망한 상황과 연관되기도 합니다.
[지수] 오늘 우리가 다룰 수치심으로서의 shame은
창피보다는 떳떳하지 못하여 부끄러움의 의미와 더 잘 통한다고요.
[이재] 이 의미 규정은 다음에 말씀드릴
수오지심과 수치심의 차이를 설명할 때 중요하니 기억해두시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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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스바움은 수치심을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라고 말해요.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있고,
그런 약점은 타인과의 갈등이나
자신의 한계에 직면할 때 드러나며
이에 근원하여 수치심이 발생한다고 설명해요.
그것을 인간의 생애주기에서
유년기의 특성과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지수] 제가 책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부분인데요,
정신분석학으로 영유아기 발달과정을 설명하면서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탐구해나가요.
책의 앞부분에서는 철학의 관점으로 책이 진행되는것 같았는데,
4장부터는 이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프로이트나 위니콧 같은
학자들을 인용하며 설명하는 것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이재] 누스바움이 수치심의 기원을 설명하는 부분이 흥미로워요.
그는 수치심의 특성을 유아기에 형성되는 수치심에 토대를 두어 설명합니다.
누스바움 본인이 밝히듯 그러한 설명은 정신분석학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임상 연구로 입증이 된 것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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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르면 유아는 생후 6개월 정도까지는,
그를 돌보는 사람들 덕분에,
언제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며 편안함과 충만함 속에서 삽니다.
그러나 의식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유아는 자신의 욕구가 언제나 자신이 원할 때
충족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분노하고,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원천을 사랑하게 됩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유아는 고통 받습니다.
누스바움은 우리가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함에서 발생하는 이 수치심을 원초적 수치심이라고 말해요.
누스바움은 유아가 이 신에 의해 불완전해진 인간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유아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만
욕망을 충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게 되고,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 결과 수치심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누스바움은 수치심에 나가 존재한다는 자기 의식과
그런 나가 사실은 무력한 존재라는 의식이 필요하다고 설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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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 그는
원초적 수치심이란 나르시시즘적 좌절의 결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완전한 줄 알았던 나의 불완전함에 의한 고통,
그것은 자기애의 좌절이라는 것이죠.
누스바움은 이런 좌절이 다섯 살 즈음부터
구체적으로 발생한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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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해야 유아기의 나르시시즘적 좌절을
건강하게 이완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뒤따르게 되죠.
누스바움은 적절한 반응과 안정적인 돌봄을 통해
아이가 스스로 자신을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정도로 말을 하고 있어요.
돌봄 제공자가 24시간 함께 있지 않아도 자기의 욕구는 충족될 수 있으며,
혼자 노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게 만들어주는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만의 세계를 형성합니다.
그때 아이는 차츰 자신이 전지전능할 필요가 없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돼요.
나르시시즘 좌절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채
유아기를 보낸 성인은 여전히
완전함, 완벽함, 편안함 등에 집착하게 되고
그에 의한 수치심에 쉽게 노출된다는 게 누스바움의 분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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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dwig and the Angry Inch (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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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헤드윅의 origin of love의 가사가
이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한 신화의 내용이죠
뮤직비디오 영상을 첨부합니다💘
누스바움은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한 신화를
설명하며 앞의 고통과 수치심을 연결짓고 있습니다.
그 신화에 따르면 태초에 완전한 존재자였던 인간은
제우스에 의해 약한 존재자가 됩니다.
인간은 필요, 불안, 불완전이라는 조건에 처해지고,
인간과 신 사이에는 격차가 발생해요.
아리스토파네스는 자신이 전혀 전지전능하지 않고
만물을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생기는 고통이라고 규정합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완전함, 완벽함, 편안함과 같은
신(神)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에게 있다고 보는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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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결점을 깨닫고 스스로의 유한성을 인정하게 됩니다.
좌절감, 무력감, 나약함 등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들이 생겨요.
수치심이라는 건
그러한 취약성을 맞닥뜨렸을 때 드러나는 감정인 거죠.
수치심은 우리의 삶 곳곳에 숨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어요.
자신의 약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자신은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수치심은 고통과 관련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내성이 있거나,
고통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나의 약점이 드러나는 게 왜 고통스러운 일이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당연히 수치심이 생기지도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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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박사와 함께 읽는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 팟캐스트 대본입니다.
일부는 생략, 수정되어 오디오와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철학박사 이재님💌 yijae_seogo@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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