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읽기 (2)
철학박사와 함께 읽는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
감정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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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스토아 학파에 대해 설명을 드리면서
강한 인지주의라는 말을 했었죠.
이에 대한 설명을 드리면서
누스바움의 이론을 알아가보면 이해하기에 쉬울 겁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인지주의는 인지과학, 뇌과학의 발달에 근거해서
감정도 일종의 지적 작용이라고 보는 입장이에요.
어떤 감정이 발현될 때
뇌의 움직임을 fMRI(뇌 속의 산소흐름과 같은 운동 상태의 촬영이 가능한 뇌단층 촬영기, 뇌의 변화 양상을 4차원으로 촬영하는 기술)로
촬영하는 등 여러 과학적 근거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발현을
자극 - 처리 - 반응과 같은 도식으로 설명하려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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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세계에 대한 반응이 아니고,
당신은 감각 입력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당신 감정의 능동적 구성자이다.
당신의 뇌는
감각 입력과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를 구성하고 행동을 지시한다.
(...)
당신의 뇌는 감각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 의미가 때로는 감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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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 이러한 뇌과학에 관련해서는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리사 팰드번 배럿의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라는 책이 도움이 됐어요.
저는 무척 재밌게 읽었는데요.
이 책에서 저자는
뇌가 나의 감정 경험을 구성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과학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법률이나 제도에 영향을 주고, 또 과학의 발견으로 인해
철학자들의 논의가 진행될 수 있다는것 자체가 놀라웠거든요.🐱
[이재] 저는 동양철학 연구자도 자연과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전의 ‘철학자’는 종합적인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었죠.
하나의 통합된 세계관에 기초해서 인문과학을 말하고,
자연과학을 말하는 거였어요.
각 지식이 서로 긴밀하게 관련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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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서, 인지주의라고 해도
그 안에는 여러 서로 다른 입장이 있습니다.
감정이 명제적 내용을 지닌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강한 인지주의라고 부릅니다.
명제적 내용이라는 건, 거칠게 말씀드리면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가리켜요.
강한 인지주의는
감정을 어떤 대상에 대한 판단과 동일한 것으로 여깁니다.
누스바움은 자신의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슬픔을 느꼈다고 서술하죠.
이 슬픔은
사랑하는 어머니가 영원히 나의 곁을 떠났다는 문장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감정을
문장의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믿음 또는 판단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을 강한 인지주의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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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약한 인지주의는
감정을 비언어적인 지각(perception)으로 이해합니다.
감정이 내가 인지한 바에 의해 발현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문장의 형태로 언어화될 수 있는
어떤 것은 아니라고 보는 입장이에요.
직관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세계를 감각했을 때, 그에 대한 숙고 없이
발현되는 지적 반응이 곧 감정이라고 보는 거죠.
우리가 촉이라고 하거나 육감이라고 부르는 게 여기에 해당할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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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 인지주의와 반대의 견해도 있죠
[이재] 비인지주의라고 불리는 입장입니다.
비인지주의자들은 감정을 신체 반응에 대한 감각’이라고 설명해요.
내가 어떤 대상을 보고 나서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몸이 덜덜 떨리는 등의 신체적 반응이 일어난 것을
의식이 감각한 것이 ‘공포’라고 보는 거죠.
내가 나의 신체적 변화를 자각함으로써 발생하는 게 감정이라는 거예요.
[지수] 비인지주의는 감정에 대한 고전적 견해라고도 할수있겠는데요,
과학자들은 감정과 관련된 뉴런들의 집합이 작동해서
신체변화를 야기한다고 설명합니다.
앞서 말한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의 리사 펠드먼 배럿은
스티븐 핑커나 달라이 라마와 같은 유명한 사상가들도
고전적 견해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이러한 비인지주의적 입장이
우리 문화 속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고,
사회제도나 법률제도에도 영향을 주고있다고 말합니다.
[이재] 누스바움은 강한 인지주의 노선에 있어요.
그는 감정에는 인지적 판단이 수반되며
그것은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고,
판단에 변화가 생기면 감정도 바뀐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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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네가지 인지적 요소
이 내용은 혐오와 수치심 54~64, 감정의 격동: 1 인정과 욕망 71~81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해당하는 부분만 찾아 읽어보셔도 이해가 더 쉬우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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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감정에는 대상이 있습니다.
감정은 그것이 관여하는
무엇인가를 대상으로 삼는 것이기에 대상에 의존적이에요.
이 말은 대상이 사라지면 그에 대한 감정도 사라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두려움은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고,
기쁨이란 무엇에 대한 기쁨이라는 거죠.
목적어가 있다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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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 누스바움은 감정의 이러한 특성에 근거해서
감정과 욕구, 기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는 욕구라는 건 가치와 무관하게, 자신의 육체적 조건에 의해
밀기(push)의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식욕, 수면욕과 같은 것들은 내 육체가 특정한 상태에 있다보니
내 안에서 밖으로 밀려나가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한 욕구는 그에 맞는 대상을 탐색하고 추구하게 만듭니다.
그에 비해 감정은 외부 대상에 의해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당겨짐(be pulled into)의 방식으로 발현됩니다.
감정은 그것을 당겨내는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죠.
기분은 특정한 대상이 없는 어떤 상태라는 면에서 감정과 다릅니다.
물론, 이런 구분이 언제나 딱 맞아떨어지진 않아요.
성욕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죠.
누스바움의 구분대로라면 성욕의 경우 나의 신체적 욕망이 먼저고
그에 따라 대상을 모색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의 경우에 대해서도 떠올려볼 수 있어요.
특정한 대상과의 만남 이후
그에 대한 욕정이 생겨나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거죠.
누스바움도 그런 애매함을 알기에
성욕은 식욕보다 감정과 유사한 면이 많고,
보다 관념적이다라고 말합니다. (혐오와 수치심, 65)
그럼에도 이러한 구분이 감정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게 그의 기본 입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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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감정의 대상은 지향적(intentional) 대상입니다.
감정에는 대상이 있다고 말씀드렸죠.
감정의 지향성은
감정과 대상이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한 개념입니다.
감정의 대상은 감정의 주체가
그 대상을 보거나 해석하는 방식에 의거해서
대상으로 정립됩니다.
대상은 주체가 그 대상을 ~로서 이해한 대상이며
감정은 그 ~로서에 기반하여 발현된다는 것이죠.
만약 누군가의 죽음으로 나에게 슬픔이라는 감정이 생겨났다면,
그 슬픔의 대상은
나를 슬프게 할 정도로 나의 삶에서 중요한 누군가였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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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감정은 대상에 대한 믿음을 포함합니다.
감정은 대상을 보는 방식만을 의미하지 않아요.
두려움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이 자신을 해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 일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믿음도 있어야 해요.
누스바움의 설명에 따르면
분노는 더 복잡한 믿음에 근원하는 감정이에요.
분노에는
1. 자신 또는 자신과 가까운 사물이나 사람에게 손해가 발생했다는 믿음,
2. 그 손해가 심각한 손해라는 믿음,
3. 그 손해는 누군가에 의해 아마도 의도적으로 발생한 것이라는 믿음 등이 수반됩니다.
잘 생각해보면,
감정에 믿음이 포함된다는 말은
그 믿음이 바뀌면 또는 내가 적극적으로 그 믿음을 수정하면
그 대상에 대해 발현된 감정도
바뀌거나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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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을 가정할 수 있어요.
평소 나는 이웃집에 사는 Lady가
꽤 위협적인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 판단은 여러 관찰과 경험,
또는 동네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작용한 결과일 거예요.
나에게는 Lady가 언제든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출근길에 내 집 앞에 있던
음식물 쓰레기 봉투가 풀어헤쳐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건 누가봐도 사람이 발로 차서 그렇게 된 것인게 분명했어요.
그 때 나는 '이건 Lady가 한 짓이다'라고 판단해서
그에 대해 분노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중에 CCTV를 확인해보니
그 쓰레기 봉투를 발로 찬 건
술에 취한 채 귀가하던 윗집 아저씨였던 거죠.
그때 나에게서는 Lady에 대한 분노가 사라지고
윗집 아저씨에 대한 분노가 새롭게 발현됩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내가 Lady에 대해 분노했던 서사가 있기에
여기에는 또 다른 믿음들이 개입하면서
복합적인 감정이 발현되게 돼요.
아무 잘못 없는 Lady에게 분노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등이 생겨나죠.
경우에 따라서는 Lady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까지도 반성하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아무 잘못 없는 사람에게 분노하는 것은
오히려 내가 그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다'와 같은
믿음이 개입한 것이겠죠.
이렇듯 감정에는 믿음이 포함되는데,
이런 믿음은 자신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생긴 암묵적 믿음 같은 거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자리잡은 어떤 믿음.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건 이런 믿음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구나'라고
깨닫게 될 때가 더 많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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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감정은 대상에 부여된 가치 또는 중요성에 대한 판단을 포함합니다.
이 때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판단은
그 대상이 나의 삶에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나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판단을 의미해요.
감정이라는 건
감정의 주체가 대상을 자신의 삶에서
가치 있거나 중요한 무엇인가로 여기기 때문에 발현되는 것이죠.
반대로 말하면,
어떤 대상을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로 여기지 않을 경우,
그와 관련된 감정은 발현되지 않아요.
나의 삶과 관련이 없는 하나의 해프닝일 뿐이고,
그에 대한 관심은 순간적이기까지 합니다.
누스바움은 대상이 나의 삶에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라는 판단을
행복주의적(eudaimonistic) 판단이라고 규정해요.
이때 행복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어떤 충만감 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해 자신이 가치를 부여한 것들에 기초하여
삶의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그렇게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들에 대해서만
감정을 표출하며 살아간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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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지향적 대상에 초점을 두며
그러한 대상에 대한 평가적 믿음을 수반한다.
혐오와 수치심, 67
감정은 세계를 주체 자신의 관점에서 보며
사건들을 개인적 중요성이나
가치에 대한 주체 자신의 감각과 연관시킨다.
감정의 격동: 1 인정과 욕망, 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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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감정이
믿을 수 없는 반응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감정이 믿음을 수반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나의 믿음은 잘못된 믿음일수도 있어요.
믿음을 갖게 된 과정에 거짓 정보가 개입되었을 가능성,
내가 가지고 있는 이해의 틀이
이미 왜곡되어 있었을 가능성 등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믿음을 수정함으로써 감정을 적절하게 만들 수 있어요.
누스바움이 말하려는 건
감정이 이성을 대체하는 지적 능력이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에요.
그의 주장은
이성적 판단에도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감정도 지적 판단의 한 부류이니
감정에 대해 진지한 분석을 함으로써 이성을 보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감정이 법과 제도에 적용될 때
우리가 그 감정에 포함된 믿음과 판단 등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그것이 불러일으킬 부정적 결과를 충분히 숙고했는지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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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박사와 함께 읽는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 팟캐스트 대본입니다.
일부는 생략, 수정되어 오디오와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철학박사 이재님💌 yijae_seogo@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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