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 읽기 (6)
철학박사와 함께 읽는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
감정이 나를 붕괴시키기 전에,
그리고 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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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우리의 행위를 추동하는 힘,
누스바움이 전하고자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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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나를 붕괴시키기 않게 하려면, 감정에 대한 대면이 필요하다.
수치심에는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자리하고 있다.
취약함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고,
완전(모두 갖춰져 있어 부족함이 없음)하고
완벽(흠이 없어 무결함)한 인간을 지향함으로써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해 수치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치심은 사회적으로, 법과 제도에 용인되어서는 안 되는 감정이다.
수치심은 자의에 의해서 또는 타의에 의해서
스스로를 집단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낙인을 찍으며,
비정상의 범주에 속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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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건설적인 수치심도 있다.
그러한 수치심은
자기애를 버리고 불완전한 자신을 인정할 때
자신의 한계를 성찰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든다.
그렇기에 수치심을 수오하는 마음으로 치환하여
자신의 부족함을 바로잡기 위한 힘으로 전환하려는 태도를
주장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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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을
주관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이해해 보려는 시도이다.
이 감정을 충동적인 것으로 여겨 빨리 외면하거나 제어하고,
이성으로 덮으려 할 것이 아니다.
감정에 포함된 요소들을 분석하여
그 안에 담긴 나를 마주할 필요가 있다.
지금 나의 감정은 무엇을 향해 발현된 것인지
대상
그 무엇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지향성에 대한 해석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어떤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으며 어떠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신뢰할 수 있는지
인지적 판단
지금 이 감정의 대상은
내 인생에 얼마만큼의 중요도를 지니고 있는지
행복주의적 판단
등을 살피다보면,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더 잘 알 게 된다.
감정은 상황에 적절하게 발현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나의 믿음을 수정하고, 판단 기준을 재정립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과정은 사회 구성원들과의 교류 속에서 이뤄진다.
나의 감정, 다른 사람의 감정을 살피는 일은
나와 타인에 대한 이해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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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 감정이 나를 붕괴시키기 않게 하려면, 감정에 대한 대면이 필요하다.
이 문장이 굉장히 와닿네요.
살다보면 감정에 무너지는, 압도되는 경험들이 있잖아요.
또 그 감정들이 판단을 흐리게하는 경험들이 있을거에요.
생각을 똑바로 하기 힘든 경험들…
감정들을 외면하거나 제어하지말고,
학자와 같은 자세로 한번 탐구해보는건 어떨까?🎀 싶네요.
추가로 연민에 대한 간단히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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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스바움은 감정에 대한 자신의 입장에 근거하여
연민을 분석합니다.
혐오와 수치심에서는 동정심이라고 번역이 되고 있어요.
compassion을 번역한 단어입니다.
국내 번역되는 누스바움의 다른 저서에서는
대부분 연민이라는 말을 쓰고 있고
저도 연민이 동정심보다 더 적절한 번역어라고 생각해서
여기서는 연민이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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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assion, pity,
sympathy, empathy 등을
번역하는 학술적 논의는
꽤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오늘은 다루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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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연민에 대한 분석을 검토하고
이를 수정하여 연민에 어떤 인지적 요소가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연민은 타인의 불행이나 괴로움을 느끼는 고통이에요.
이러한 연민에는 세 가지 인지적 요소가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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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이 심각한 것이라는 믿음 또는 평가
고통을 겪고 있는 그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믿음
자신도 그러한 고통을 겪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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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성 seriousness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따르면
크기(size)라고 정의할 수 있어요.
연민도 감정이기에 여타 감정과 마찬가지로 가치 판단을 수반합니다.
그것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잘 사는 것과 관련하여
스스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연민의 주체가 알고 있음을 의미해요.
누스바움은 우리가 칫솔이나 종이 집게처럼
사소하거나 쉽게 대체할 수 있는 물품을 잃어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연민의 감정이 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로 제시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고통 또는 불행은 당사자가 그와 관련된 대상을
얼마나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크기가 결정됩니다.
동일한 대상이더라도 그에 따른 고통의 크기는
사람마다, 사회마다 다를 수 있어요.
[지수] 감정을 ‘크기’와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는 게 흥미롭습니다.
[이재] 명확하게 정량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는 분명 우리 주변의 것들을 중요도에 따라 분류하고는 합니다.
연민은 어떤 사람이 자신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 고통을 겪을 때,
감정 주체가 그 고통의 심각성에 동의함으로써,
다른 말로하면 공감함으로써 발현되는 감정이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칫솔을 잃어버렸다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에 대해 연민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 칫솔에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다는 걸 알면,
가령 (흔한 경우는 아니겠지만) 그 칫솔이 소중한 누군가의 유품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 때는 연민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연민도
가치 또는 중요성에 대한 판단을 포함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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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fault
어떤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우리는 과연 그가 그러한 고통을 당하기에
마땅한 사람인지 평가하게 됩니다.
연민은 그에게 그의 고통에 대한 잘못이 없다고 믿거나
그의 고통 혹은 그에 대한 책망이 잘못에 비해
과하다고 믿을 경우 생겨나요.
이에 대해 누스바움은
타인에 대한 연민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감정 주체가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것을
항상 자신의 의지대로 처리할 수 없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운에 의해 훼손될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통의 원인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며
그에 마땅한 정도의 고통과 책망을 받고 있다면
연민은 발현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연민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라는 생각과 함께 발현이 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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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한 가능성 similar possibilities
이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과
자신이 유사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음에 대한 자각에 해당해요.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이 심각하고 부당하다고 믿지만
그것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하지 않으면
연민은 끝내 발현되지 않아요.
자신도 그와 유사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판단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취약성(vulnerability)을 깨닫는 것에서 비롯해요.
[지수] 본인의 취약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앞서 설명해주신 나르시즘을 극복한 모습같은데요.
[이재]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언제든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
완벽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인정이
곧 유사한 가능성으로 이어집니다.
자신과 타인을 구분짓고,
자신은 마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거나
해당사항이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면
타인의 고통은 더 이상 나의 관심사가 아니게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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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성 seriousness, 잘못 fault, 유사한 가능성 similar possibilities
이 세 가지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연민의 세 가지 요소입니다.
누스바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서
세 번째 요소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해요.
연민이 발생하기 위하여
반드시 자신과 타인의 관계가 고려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누스바움은 감정의 인지적 요소로서
행복주의적 판단을 제시했었죠.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감정은
자신이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고 판단한 것에 관하여 발현돼요.
누군가의 사망에 슬픔이 생기기 위해서는
사망자가 지니고 있었던 삶의 목표와 계획을
슬픔의 주체도 중요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어야만 슬픔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누스바움은 연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연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감정 주체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목표와 계획의 중요한 가치로 판단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감정이라는 건 언제나 나의 삶의 문제와 관련하여 발현된다는 것이죠.
타인과 공유하는 나의 취약성,
그 유사성에 의해 연민이 생기는 게 아니라,
그의 고통이 곧 나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때
연민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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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 여러 감정들 중에 하필 ‘연민’을 설명하면서
오늘 강의 마무리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재] 누스바움에게 수치심은 사회의 건강함을 해치는 감정이에요.
반면에 연민은 사회 구성원 간의 정서적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감정입니다.
우리는 연민으로써 나가 언제든 너가 될 수 있고,
너가 언제든 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어요.
나와 너는 불완전하고 약한 존재라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 연민인 것이죠.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자신의 불완전성에 의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연민으로부터 우리는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를 보살피는 동류의식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너를 보살펴줄 나와, 나를 보살펴줄 너가
서로의 곁을 지켜줌으로부터 생겨나는 안도감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이 됩니다.
연민은 힘이 쎄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나의 연민은 사회적 변화를 야기합니다.
부당하게 고통받는 자에 대한 연민은 감정의 발생에 그치지 않고,
그와 관련된 법과 제도의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여러분께서 타인의 고통에
나의 불편함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연민으로써 우리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지향하길 바랍니다.
타인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연민으로써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라며
마무리 말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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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박사와 함께 읽는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 팟캐스트 대본입니다.
일부는 생략, 수정되어 오디오와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철학박사 이재님💌 yijae_seog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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